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(문단 편집) == 군대 == [[파일:23499A4656D00CE40DAB5D.jpg]] [[국방장관]]으로 [[로돌포 그라치아니]]가 임명되면서 [[검은 셔츠단]]를 다시 창설하고, 사실상 이들이 군대로 쓰였다. 물론 [[검은 셔츠단]]들 빼고 몇몇 [[민병대]]도 있었다고 하며 이외에도 [[https://en.m.wikipedia.org/wiki/National_Republican_Army|국가 공화국군]]이라는 가장 정규군스러운 조직도 있었다. 하지만 이들은 연합군과의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능력조차도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[[파르티지아노|파르티잔 유격대]] 및 게릴라 토벌을 할 수 있는 형편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.[*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, 이탈리아의 파르타잔([[파르티지아노]])이나 게릴라 규모는 흔히 알려진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초과했다. 이들은 독일군에 의해 강제 해산된 이탈리아군이 뿌린 무기를 접수하고, 44~45년 내내 북부 이탈리아 곳곳에서 독일군과 살로 공화국을 공격했다. 연합군과의 연합작전도 펼쳤고, 연합군에 앞서 [[밀라노]], [[파르마]] 등 북부 도시들을 해방시켰다.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좌파 성향이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들보다도 더 강경한, 한마디로 공산당에 근접한 좌파 성향을 띄었던 데다가 매우 호전적이었던 탓에 살로 공화국은 이들을 잡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.] 괴뢰 정권이긴 했지만 독자적인 공군 부대도 있었다. 살로 공화국의 공군성 차관은 당시 '''중령'''이었던 에르네스토 보토(Ernesto Botto)가 맡았는데, [[스페인 내전]]에 참전해서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공군에 남아 활동해서 당시 이탈리아 공군 내에서 인망이 높았다. 그래서 에르네스토 보토가 살로의 공군 수뇌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들 중 살로 측에 합류한 인사들도 꽤 있었다. 게다가 에르네스토 보토는 살로 공군은 독일군과는 독립적인 명령 및 조직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고 이를 위해 아예 독일 공군의 총수인 [[헤르만 괴링]]에게 직접 찾아가서 담판을 지어 이를 성사시켰다.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당연히 독일군 측과 마찰이 생겼고, 결국 독일 측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보토는 1944년 [[차관]]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. 또한 의외로 살로 공화국 해군도 일단 존재하기는 했다. 하지만 이탈리아 항복 과정에서 [[이탈리아 왕립 해군]]이 보유하고 있던 [[리토리오급 전함]] 등 대형함들이 죄다 연합국으로 넘어가버렸고, 순양함급, 심지어는 구축함급 함선들도 다수가 연합국에 항복해버린 데다가,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군 장교들이 대거 전향하면서 살로 공화국 해군은 완전히 빈 껍데기만 남아버렸다. 그나마 독일이 어뢰정이나 소형 반잠수정 몇 척을 보내주는 등 없는 상황에서도 약간의 지원을 해주었고, 살로 공화국도 자체적으로 Decima flotiglia MAS에서 갈라져 나온 대원들을 이용하여 해군 특수부대를 창설하기도 했지만, 그래봤자 겨우 연안 순찰이나 기뢰 부설같은 임무밖에는 할 수 없었다. 이런 열악한 상황으로 인하여 살로 공화국 해군의 유일한 전공은 1945년 4월, 어뢰정으로 [[프랑스 해군]]의 구축함 트롬베를 중파시킨 것이 전부다. 여담으로 초기 살로 공화국 해군은 백전노장의 해군 제독 [[이니고 캄피오니]](Inigo Campioni)를 지휘관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해군을 재건하려 하였으나, 캄피오니는 살로 공화국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살로 공화국은 그를 처형했다. 여러모로 [[이탈리아 왕국]]이 연합국으로 전향하고 [[연합군]]의 일원으로 참가한 이탈리아 공동교전군(Italian Co-belligerent Army)[* 이탈리아 협동군, 남 왕국군(Esercito del Sud), 이탈리아 해방군(Italiano di Liberazione) 등, 편성 시기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.]과 비교되는데, 독일군과 히틀러가 이탈리아인을 믿지 못하고, 종전까지 살로 공화국에게 괴뢰정부 이상의 권한을 주지 않아 살로 공화국의 군대는 5만 남짓에 그마저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점령국 취급을 받으며 후방 [[파르티잔]] 토벌에만 동원된 반면,[*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군은 [[무솔리니]]가 실각하고,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항복하는 전후로 이탈리아군을 적대군으로 취급하고 강제 무장해제를 벌였기에(Operation Achse:악세 작전),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이탈리아군도 몇 만명은 되었다. 그리고 나머지 60만명은 독일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노동 캠프에 들어가 노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장과 건설, 농업 노동자로 종사했다. 이런 상황이니 히틀러와 독일군은 살로 공화국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. ] [[연합국]]은 남쪽에 남은 [[이탈리아 왕국군]]을 지원하여 전투의 일원으로 참가시켰다. 이 이탈리아 공동교전군은 [[조반니 메세]], 움베르토 유틸리 등 구 [[이탈리아 왕국군]] 장성 출신들이 지휘를 맡았으며, 처음에는 1개 차량화 전투단으로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6개 사단급 전투단을 합쳐 30만명 규모까지 확대되었다. 이들은 치안유지와 병참, 대공방어, 해안 경비 등 후방에서 연합군을 서포트하는 위치긴 했지만, [[몬테카시노 전투]], 안코나 전투(Battle of Ancona), [[볼로냐]] 해방 등, 미국 제2군단과, 영국군 제5군단, 10군단과 함께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해 활약했으며, 현대 [[이탈리아군]]의 전신이 되었다.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Military_ranks_of_the_Italian_Social_Republic|계급 목록]] [[아돌프 히틀러]]와 독일군 수뇌부는 마지막까지도 동맹국과 자신들의 역량을 끌어모을 통찰력도 보여주지 못했다.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Template:Armed_Forces_of_the_Italian_Social_Republic|편제 목록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